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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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독일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로, 정수론, 대수학, 해석학, 미분기하학, 측지학, 전자기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1799년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증명하고, 1801년에는 《산술 연구》를 통해 정수론을 학문적으로 확립했으며, 최소제곱법, 가우스 곡률 등 다양한 수학적 기법과 이론을 개발했다. 또한, 세레스의 궤도를 예측하여 천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전자기학 연구를 통해 전자기식 전신기를 개발하는 등 응용 과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가우스는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라는 말을 남겼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가우스상, 가우스 단위 등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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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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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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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출생일 | 1777년 4월 30일 |
출생지 | 브라운슈바이크,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855년 2월 23일 |
사망지 | 괴팅겐, 하노버 왕국, 독일 연방 |
분야 | 수학 천문학 측지학 자기학 |
모교 | 콜레기움 카롤리눔 괴팅겐 대학교 헬름슈테트 대학교 (박사) |
직장 | 괴팅겐 대학교 |
학위 논문 제목 | Demonstratio nova... |
학위 논문 URL | Demonstratio nova... |
학위 논문 년도 | 1799년 |
박사 지도 교수 | 요한 프리드리히 파프 |
배우자 | 요한나 오스트호프 (1805년 결혼, 1809년 사망) 민나 발데크 (1810년 결혼, 1831년 사망) |
자녀 | 6명 |
수상 | 랄랑드상 (1809년) 코플리 메달 (18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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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명칭 | |
독일어 표기 |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발음(IPA) | /kaʁl ˈfʁiːdʁɪç ˈɡaʊs/ |
라틴어 명칭 | |
라틴어 표기 | Carolus Fridericus Gauss |
일본어 명칭 | |
일본어 표기 | カール・フリードリヒ・ガウス |
한국어 명칭 | |
한국어 표기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가우스의 업적 | |
주요 업적 | 비유클리드 기하학 가우스-뤼카 정리 가우스-보네 정리 가우스의 빼어난 정리 가우스 적분 대수학의 기본 정리 이차 상호 법칙 가우스 정수 가우스 법칙 가우스 소거법 가우스 곡률 가우스 함수 |
영향을 준 학자 | 소피 제르맹 |
제자 | |
박사 제자 | 리하르트 데데킨트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게를링 빌헬름 클링커푸스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 베른하르트 리만 아우구스트 리터 카를 폰 스타우트 |
주요 제자 | 페르디난트 고트홀트 막스 아이젠슈타인 요한 프란츠 엔케 카를 볼프강 벤야민 골트슈미트 아돌프 테오도르 쿠퍼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모리츠 슈테른 게오르크 프레데리크 우르신 모리츠 루드비히 게오르크 비히만 |
기타 | |
그 외의 영향 | 모두 보기 |
2. 생애
수학계 최고의 거장 가우스는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벽돌 굽는 일을 하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우스의 아버지는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벽돌 노동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우스는 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유년 시절에 아버지와 자주 다퉜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우스의 학업에 긍정적이었고,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와 삼촌의 지원 덕분에 가우스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지원으로 1792년부터 1795년 사이에 카롤링 학교(Collegium Carolinumla, 지금은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교(Technische Universität Braunschweig))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후에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도움을 받아서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가, 1795년부터 1798년까지 머물렀다. 괴팅겐 대학교에서 가우스는 몇 가지 중요한 이론들을 독립적으로 재발견하였다.
1796년 가우스는 변의 개수가 페르마 소수인 정다각형은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특히, 3월 30일에 정 17각형의 작도가 가능함을 발견하였다. 이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수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온 작도 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훗날에 가우스는 이 결과에 너무 기뻐한 나머지 아르키메데스가 묘비에 원기둥에 내접한 구를 새겼고, 야코프 베르누이가 묘비에 로그 나선을 새긴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묘비에 십칠각형을 새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원과의 구별이 어렵기 때문에, 십칠각형을 대신해 17개의 점으로 된 별이 새겨졌다. 또한, 가우스는 정수론 영역에서 합동 산술을 발견했고, 1796년 4월 8일에 최초로 이차 상호 법칙을 증명해 보였다. 이 놀라운 일반 법칙은 수학자들이 이차 방정식의 해결 가능성을 결정지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1796년 5월 31일에 추측된 소수 정리는 소수들이 정수들 사이에서 어떻게 분포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가우스는 모든 자연수는 3개의 삼각수들로 나타날 수 있음을 7월 10일에 증명해 보이면서, 그의 일기에 "Heureka! num=Δ+Δ+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796년 10월 1일에는 다항식의 유한한 영역에서 계수에 따른 해의 개수에 대한 연구 결과를 출판했다.
그는 대표적 저서인 《산술 연구》를 21살이던 1798년에 완성하였는데, 이는 1801년에서야 출판되었다.
가우스는 1805년 10월 9일 브런스윅의 성 캐서린 교회에서 요하나 오스토프와 결혼했다.[149] 그들에게는 요셉(1806~1873), 빌헬미네(1808~1840), 루이스(1809~1810) 세 자녀가 있었다. 요하나는 루이스가 태어난 지 한 달 후인 1809년 10월 11일에 사망했고,[149] 루이스 또한 몇 달 후 사망했다.[149] 가우스는 첫 번째 소행성을 발견한 주세페 피아치, 빌헬름 올베르스, 카를 루트비히 하딩을 기려 자녀들의 이름을 지었다.
1810년 8월 4일 가우스는 첫 번째 부인의 친구였던 빌헬미네(민나) 발덱과 재혼하여 유겐(나중에 유진)(1811~1896), 빌헬름(나중에 윌리엄)(1813~1879), 테레제(1816~1864) 세 자녀를 더 두었다. 민나 가우스는 10년 넘게 심각한 병을 앓다가 1831년 9월 12일에 사망했다.[24] 그 후 테레제가 가사를 맡아 가우스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를 돌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배우 콘스탄틴 슈타우페나우와 결혼했다. 그녀의 언니 빌헬미네는 동양학자 하인리히 에발트와 결혼했다. 가우스의 어머니 도로테아는 1817년부터 1839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의 집에서 살았다.[6]
장남 요셉은 아직 학생이었을 때 1821년 여름 측량 캠페인 중에 조수로 아버지를 도왔다. 1824년 대학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후 요셉은 하노버 군대에 입대하여 1829년에 다시 측량을 도왔다. 1830년대에는 왕국의 서부 지역으로 측량망을 확장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는 측지학 자격을 갖추고 군 복무를 그만두고 하노버 왕립 국영 철도의 국장으로 철도망 건설에 참여했다. 1836년에는 몇 달 동안 미국에서 철도 시스템을 연구했다.
유겐은 1830년 9월 괴팅겐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5년 동안 군대에 복무했다. 그 후 중서부의 아메리칸 퍼 컴퍼니에서 일했다. 나중에 미주리주로 이주하여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다. 빌헬름은 천문학자 베셀의 조카딸과 결혼했다. 그 후 미주리주로 이주하여 농부로 시작하여 후년에 세인트루이스에서 신발 사업으로 부자가 되었다. 유진과 윌리엄은 미국에 수많은 자손을 두고 있지만, 독일에 남은 가우스의 후손들은 딸들에게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요셉의 후손들로 이어집니다.
19세기 초 20년 동안 가우스는 독일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수학자였으며, 당시 선두적인 프랑스 수학자들과 비교될 만했다. 그의 저서 ''산술연구''는 독일에서 프랑스어로 번역된 최초의 수학 서적이었다.
가우스는 1799년부터 기록된 연구, 풍부한 새로운 아이디어, 그리고 엄격한 증명으로 "새로운 발전의 선두에" 있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같은 이전 수학자들은 독자들이 올바른 경로에서 벗어난 특정 오류를 포함하여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추론에 참여하도록 했지만, 가우스는 독자에게 저자의 사고 과정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 직접적이고 완전한 설명의 새로운 스타일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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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파르카스 볼리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전혀 다른 이상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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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에 공개된 논문, 그의 과학적인 일기, 그리고 그의 교과서에 있는 간략한 주석들은 그가 상당 부분 경험적인 방식으로 연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평생 동안 바쁘고 열정적인 계산가였으며, 대부분 정확한 검토 없이 놀라운 속도로 계산을 했지만, 뛰어난 추정으로 결과를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산은 항상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능숙한 도구를 사용하여 엄청난 작업량을 처리했다. 가우스는 많은 수학 표를 사용하고, 그 정확성을 검토하고, 개인적인 용도로 다양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표를 만들었다. 그는 가우스 소거법과 같이 효과적인 계산을 위한 새로운 도구를 개발했다. 그의 작업 스타일의 특징적인 부분으로 여겨지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높은 정밀도로 계산을 수행하고, 실제 목적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소수점 자릿수로 표를 작성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방법은 그가 정수론에서 정리를 찾는 데 사용한 많은 자료를 제공했을 것이다.
가우스는 완벽하고 비판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작품은 발표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완벽주의는 그의 개인 문장의 모토인 Pauca sed Maturala ("적지만 완숙한")와 일치했다. 많은 동료들이 그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개하도록 격려했고, 그의 의견으로는 그가 너무 오랫동안 주저하면 비난하기도 했다. 가우스는 아이디어의 초기 발견은 쉬웠지만, 제시할 만한 설명을 준비하는 것은 시간 부족이나 "마음의 평정"으로 인해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양한 저널에 긴급한 내용의 많은 짧은 논문을 발표했지만, 상당한 문학적 유산을 남겼다. 가우스는 수학을 "과학의 여왕"이라고, 산술을 "수학의 여왕"이라고 언급했으며, 아마도 한때 일류 수학자가 되기 위한 기준으로 오일러의 공식을 즉시 이해해야 한다는 믿음을 주장했다고 한다.
때때로 가우스는 다른 학자의 아이디어가 이미 이전에 그의 소유였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의 우선권에 대한 개념은 "최초로 발표한 사람이 아니라 최초로 발견한 사람"으로, 그의 과학적 동시대인들의 개념과 달랐다. 수학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데 있어 그의 완벽주의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인용을 부주의하게 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그는 매우 특별한 인용 관행에 대한 견해로 자신을 정당화했다. 만약 그가 참고 문헌을 제시했다면, 중요한 이전 저자들에 대해서만 매우 완전한 방식으로 제시했으며, 아무도 무시해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인용하려면 과학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그가 쓰고 싶어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가우스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친구 사르토리우스(Sartorius)가 다소 열정적인 어조로 쓴 첫 번째 전기를 출판했다(1856년). 사르토리우스는 그를 순수하고 진취적인, 어린아이 같은 겸손함을 지닌 인물이자, 동시에 "강철 같은 성격"과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다. 가까운 측근 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를 "과학의 정상에 앉아 있는 올림포스 신"처럼 예의 바르고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여겼다. 가우스의 가까운 동시대인들은 그가 다루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데 동의했다. 그는 종종 칭찬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방문객들은 그의 까다로운 태도에 때때로 짜증을 냈지만, 얼마 후 그의 기분은 바뀌어 매력적이고 마음이 열린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가우스는 논쟁적인 성격을 혐오했으며, 동료인 하우스만과 함께 "항상 어떤 논쟁에 휘말렸기 때문에" 괴팅겐 대학의 교수직에 유스투스 폰 리비히를 초빙하는 것에 반대했다.
가우스의 삶은 가정의 심각한 문제들로 인해 어두워졌다. 그의 첫 번째 아내 요하나가 셋째 아이를 낳은 직후 갑자기 사망했을 때, 그는 고대 비가의 형식으로 죽은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슬픔을 드러냈는데, 이는 가우스의 가장 개인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13년이 넘도록 결핵이 그의 두 번째 아내 민나의 건강을 망가뜨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두 딸도 나중에 같은 병을 앓았다. 가우스 자신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약간의 암시만을 남겼다. 1831년 12월 베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을 "최악의 가정적 고통의 희생자"라고 묘사했다.
아내의 병 때문에 두 아들은 몇 년 동안 괴팅겐에서 멀리 떨어진 첼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장남 요셉의 군 경력은 20년 이상 지속된 후, 상당한 측지학 지식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봉급이 적은 소위 계급으로 끝났다. 그는 결혼한 후에도 아버지에게 재정적 지원을 필요로 했다. 차남 에우겐은 아버지의 계산과 언어에 대한 재능을 상당 부분 공유했지만, 활기차고 때로는 반항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어학을 공부하고 싶어했지만, 가우스는 그가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다. 빚을 지고 공개적으로 스캔들을 일으킨 후, 에우겐은 1830년 9월 극적인 상황 속에서 괴팅겐을 떠나 브레멘을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시작하려고 가져간 적은 돈을 낭비했고, 그 후 아버지는 더 이상 재정적 지원을 거부했다. 막내 아들 빌헬름은 농업 행정을 위해 자격을 얻고 싶어했지만, 적절한 교육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이민을 갔다. 가우스의 막내딸 테레제만이 그의 말년을 함께했다.
유용하든 쓸모없든 매우 다양한 것들에 대한 수치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은 그의 말년에 습관이 되었는데, 예를 들어 그의 집에서 괴팅겐의 특정 장소까지의 경로 수, 또는 사람들의 생존 일수 등을 기록했다. 그는 1851년 12월 훔볼트에게 아이작 뉴턴이 사망할 때와 같은 나이에 도달했다는 것을 축하하며, 날짜로 계산했다.
뛰어난 라틴어 실력과 마찬가지로 그는 현대 언어에도 능통했다. 62세에 그는 아마도 러시아의 과학 저술, 특히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로바체프스키의 저술을 이해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가우스는 고전 문학과 현대 문학, 그리고 영어와 프랑스어 작품을 원어로 읽었다. 그의 가장 좋아하는 영국 작가는 월터 스콧, 가장 좋아하는 독일 작가는 장 폴이었다. 가우스는 노래를 좋아했고 콘서트에 갔다. 그는 신문을 열심히 읽었고, 말년에는 매일 정오에 대학의 학술 언론 살롱을 방문하곤 했다. 가우스는 철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당시의 ''자연철학'' 학파 지지자들을 가리켜 "소위 형이상학자들의 머리카락을 가르는 것"이라고 비웃었다.
가우스는 "귀족적이고 철저히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지능과 도덕성에 대한 존중이 적었으며, "mundus vult decipi"라는 모토를 따랐다. 그는 나폴레옹과 그의 체제, 그리고 모든 종류의 폭력과 혁명을 혐오했다. 따라서 그는 1848년 혁명의 방법들을 비난했지만, 통일된 독일이라는 생각과 같은 일부 목표에는 동의했다. 정치 제도에 관한 한, 그는 헌법 제도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렸고, 당시의 의원들을 지식 부족과 논리적 오류로 비판했다.
일부 가우스 전기 작가들은 그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 추측해 왔다. 그는 때때로 "신은 산술화한다"라고 말했고, "나는 내 노력 덕분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성공했다"고 말했다. 가우스는 독일 북부의 대부분의 인구처럼 루터교 신자였다. 그는 모든 교리를 믿거나 성경을 완전히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르토리우스는 가우스의 종교적 관용을 언급했고, 그의 "진리에 대한 끝없는 갈증"과 정의감을 종교적 신념에 의해 동기 부여된 것으로 평가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1777년 4월 30일 브런즈비크-볼펜뷔텔 공국(현재 독일 니더작센주) 브런즈비크(브라운슈바이크)에서 태어났다.[4] 그의 가족은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4] 아버지 게브하르트 디트리히 가우스(1744–1808)는 여러 직업을 가졌으며, 어머니 도로테아는 거의 글을 읽지 못했다.[4]


가우스는 어릴 적부터 수학 신동이었다. 7세 때, 초등학교 산수 수업에서 선생님이 1부터 100까지의 모든 숫자를 더하라는 문제를 냈는데, 가우스는 몇 초 만에 5050이라는 정답을 제시했다.[137] 1부터 100까지 더하면 (1+100), (2+99)와 같이 각 쌍의 합이 101이 되고, 총 50쌍이 있으므로 101×50=5050으로 계산한 것이다.[137] 가우스의 지도 교사였던 뷔트너는 가우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가우스에게 더 공부할 기회를 주고자 했다.[137] 뷔트너는 가우스의 아버지에게 가우스에게 수학을 공부시키도록 설득했고, 가우스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게 알려져 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140]
가우스는 1792년부터 1795년까지 콜레기움 카롤리눔에서, 1795년부터 1798년까지 괴팅겐 대학교에서 수학, 과학, 고전을 공부했다.[6] 가우스의 수학 교수는 아브라함 고트헬프 퀘스트너였다. 가우스는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와 크리스티안 고틀롭 하이네의 강의를 즐겨 들었다.[7] 대학에서 요한 프리드리히 벤첸베르크, 파르카시 볼리아이, 하인리히 빌헬름 브란데스와 교류했다.
2. 2. 학문적 성장과 주요 업적
1799년 박사 학위 논문에서 가우스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증명했다.[143] 이후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세 가지 다른 증명을 추가로 제시하며 복소수의 중요성을 확립했다.[5] 1801년에는 《산술 연구》를 출판하여 합동 산술을 서술하고, 이차 상호 법칙을 최초로 증명했다.[29] 이 책에서 자연수의 유일 인수분해 정리가 명확하게 제시되고 증명되었다.[144]주세페 피아치가 세레스를 발견한 후, 가우스는 세레스의 궤도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과학계에 이름을 알렸다.[146] 1807년 괴팅겐 천문학 관측소의 박사 겸 괴팅겐 대학교 천문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11][9] 19세기 초, 가우스는 천체 경찰이라는 비공식 천문학자 그룹과 교류하며 소행성과 혜성 자료를 수집했고, 이를 바탕으로 1809년 천문학적 걸작인 ''천체의 운동론(Theoria motus corporum coelestium)''을 발표했다.[145]
1809년 가우스는 ''Theoria motus''(천체운행론)에서 최소자승법의 작용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는 현재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는 계산법이다. 가우스는 정규분포에 기초하여 최소자승법에 의한 추정의 우수성을 증명했지만, 아드리앵 마리 르장드르가 1805년에 먼저 발표하여 선취권 논쟁이 있었다.
1818년 하노버 왕국의 측량을 위해 정규 분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측량 결과의 오차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이때의 측량 성과를 정리하며 등각사상에 의한 지구 타원체 표면에서 평면으로의 지도 투영법인 가우스-크뤼거 도법을 고안했다.
측량에 대한 관심에서 곡면론을 창시하여 리만 기하학에 영향을 주었다. 1827년 『곡면의 연구』를 출판하고, 가우스 곡률이 곡면의 내재적인 양에만 의존한다는 Theorema Egregium(가우스의 기본 정리)를 제시했다.
가우스는 쌍곡 기하학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친구 파르카슈 볼프강 보야이와 그의 아들 야노슈 보야이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연구했지만, 가우스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1831년 빌헬름 벨버와의 공저를 통해 전자기학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다. 가우스의 정리, 가우스 법칙, 가우스(자속밀도의 단위), 가우스 단위계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전기에서의 키르히호프의 법칙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하고 전신 장치를 만들었다.
가우스는 완벽하지 않은 작품은 발표하지 않는 완벽주의를 추구했으며, 그의 문장에는 Pauca sed Maturala ("적지만 완숙한")라는 모토가 새겨져 있다.[37] 그는 수학을 "과학의 여왕", 산술을 "수학의 여왕"이라고 언급했다.[36]
2. 3. 괴팅겐 천문대장 재직

1807년 11월, 가우스는 베스트팔렌 왕국의 제롬 보나파르트 치하 괴팅겐 대학교의 정교수 겸 괴팅겐 천문대 천문대장으로 초빙되어 1855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그는 곧 베스트팔렌 정부로부터 전쟁 기여금으로 2,000 프랑을 요구받았으나, 프랑크푸르트의 익명 인물(후에 대공 카를 테오도르 안톤 마리아 폰 달베르크)이 이를 대신 지불해주었다.
가우스는 1748년 영국 국왕 조지 2세가 설립하고 개조된 요새 탑에 건설한 60년 된 천문대의 대장직을 맡았다. 새로운 천문대 건설은 1802년부터 조지 3세 선제후에 의해 원칙적으로 승인되었고, 가우스는 1816년 9월까지 새로운 직장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9] 그는 요한 게오르크 레프솔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라이헨바흐,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 로부터 천정통과권과 태양계를 포함한 새로운 최신 장비를 얻었다.
순수 수학 외에 가우스의 과학 활동은 크게 세 기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9세기 처음 20년은 천문학, 세 번째 10년은 측지학, 네 번째 10년은 주로 자기학인 물리학이었다.
가우스는 학술 강의를 싫어했지만,[11][9] 괴팅겐에서의 학문 경력 시작부터 1854년까지 꾸준히 강의를 했다. 그는 종종 가르치는 일의 부담에 대해 불평하며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11] 그의 강의 대부분은 천문학, 측지학, 응용수학에 관한 것이었고, 순수 수학 과목에 대한 강의는 세 번뿐이었다.[11] 가우스의 제자 중에는 리하르트 데데킨트, 베른하르트 리만 등 저명한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가 많았다.[11]
가우스는 어떤 교과서도 쓰지 않았고, 과학적 문제의 대중과학화를 싫어했다. 그의 유일한 대중화 시도는 부활절 날짜(1800/1802)에 관한 작품과 1836년의 논문 "지구자기 및 자력계"였다. 가우스는 자신의 논문과 책을 라틴어 또는 독일어로만 출판했다.



1808년 괴팅겐 대학교 취임 강연에서 가우스는 강력한 미적분에 의해서만 얻어진 신뢰할 수 있는 관측과 결과를 천문학의 유일한 과제라고 주장했다.[12] 대학에서 그는 자신의 분야의 다른 강사들의 직원들과 함께 교육 프로그램을 완성했다.[13] 천문대가 완공되었을 때 가우스는 새 천문대의 서쪽 날개에, 카를 루트비히 하딩은 동쪽 날개에 거처를 마련했다.[9] 가우스는 새로운 천정통과권을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했고, 드물게 공동 관측을 제외하고는 하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마르틴 브렌델은 가우스의 천문 활동을 시간 순서대로 일곱 기간으로 나누는데, 1820년 이후의 해는 "천문 활동이 저조한 시기"로 간주된다. 새롭고 잘 갖춰진 천문대는 다른 천문대만큼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가우스의 천문학 연구는 장기적인 관측 프로그램 없이 1인 기업의 성격을 띠었고, 하딩이 1834년 사망한 후에야 대학에서 조교를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우스는 여러 대학교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아마도 가족의 어려운 상황 때문일 것이다.[15] 가우스의 봉급은 1810년 1,000 라이히스탈러에서 1824년 2,400 라이히스탈러로 인상되었고,[9] 말년에는 대학에서 가장 많은 봉급을 받는 교수 중 한 명이었다.
1810년 동료이자 친구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셀이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어려움을 겪자 가우스는 1811년 3월 괴팅겐 철학부에서 베셀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 가우스는 소피 제르맹에게 명예 학위를 추천했지만, 그녀가 사망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받지 못했다.
가우스는 하노버 왕가에 충성했다. 1837년 빌헬름 4세가 사망한 후, 새로운 하노버 국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1833년 헌법을 폐지했다. 나중에 "괴팅겐 칠인"으로 알려진 일곱 명의 교수가 이에 항의했는데, 그중에는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와 가우스의 사위 하인리히 에발트가 있었다. 가우스는 이 분쟁에 깊이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지 못했다.
가우스는 학문 행정에 참여하여 세 번이나 철학부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9년 동안 괴팅겐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가우스는 통풍과 일반적인 불행을 겪으면서도 노년에도 정신적으로 활동적이었다. 1855년 2월 23일, 그는 괴팅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거기의 알바니 묘지에 매장되었다. 가우스의 사위인 하인리히 에발트와 가우스의 절친이자 전기 작가인 볼프강 자르토리우스 폰 발터스하우젠이 장례식에서 추도 연설을 했다.
가우스는 성공적인 투자자였으며 주식과 증권으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2. 4. 말년과 사망
1855년에 독일 괴팅겐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괴팅겐의 알바니프리드호프(Albanifriedhof) 묘지에 묻혔다.[148] 가우스의 사위 Heinrich Ewaldde와 가우스의 가까운 친구이자 전기 작가였던 Wolfgang Sartoriusde가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맡았다. 1989년부터 2001년까지 유로화가 도입되기 전까지 그의 초상화와 정규분포 곡선이 10마르크 지폐에 인쇄되어 있었다.
가우스의 뇌는 보존되어 루돌프 바그너(de|Rudolf Wagner}})가 연구하였다. 뇌 무게는 1.492kg, 대뇌 부분은 219.588cm3이었고, 회백질이 많이 발달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20세기 초에 그의 천재성을 설명하는 증거로 제시되었다.[19][20] 지리학자인 바그너의 아들 헤르만은 그의 박사 논문에서 대뇌 피질 면적을 219,588mm2로 추정했다.[21] 2013년, 괴팅겐에 있는 막스 플랑크 생물물리화학 연구소의 신경생물학자는 최초 조사 직후 잘못된 표시로 인해 가우스의 뇌가 몇 달 후 괴팅겐에서 사망한 의사 콘라트 하인리히 푸크스의 뇌와 혼동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22] 추가 조사 결과 두 사람의 뇌 모두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따라서 1998년까지 가우스의 뇌에 대한 모든 조사는 루돌프와 헤르만 바그너의 최초 조사를 제외하고 실제로 푸크스의 뇌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23]
가우스는 완벽주의자이며 대단히 열심히 일하는 학자였다. 그는 개인적인 모토인 "드물지만 성숙하게"(Pauca sed maturala)에 철저하기 위해 스스로 보기에 완벽하거나 비판을 견디리라고 생각되지 않는 원고는 결코 출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시대인들이 대단한 수학적 업적이라고 발표한 것들을 수년 또는 수십 년 전에 그가 먼저 발견했다는 사실이 일기를 검토한 후대인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수학사가인 에릭 템플 벨(Eric Temple Bell)은 "만일 가우스가 그의 모든 발견들을 적시에 출판했더라면, 인류의 수학사는 50년은 당겨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우스는 자신을 따르는 젊은 수학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드물게 소수의 수학자들과 협력 작업을 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오만하고 엄격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학생도 적은 수만을 받았는데, 그나마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회는 1828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모임에만 한 차례 참석하였다. 그런 중에서도 그의 제자 가운데 리하르트 데데킨트, 베른하르트 리만, 프리드리히 베셀 등은 당대 가장 뛰어난 수학자로 성장하였다. 가우스는 우편으로 교류하였던 프랑스의 여성 수학자 소피 제르맹의 능력을 인정하며, 명예 학위를 수여하려 했다.
아이작 아시모프에 따르면, 어떤 문제와 씨름하던 중, 그의 아내가 아파서 죽어간다는 말을 듣자, "그녀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 주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월도 더닝턴(Waldo Dunnington)의 《가우스, 과학의 타이탄》에도 짧게 소개되어 있지만, 더닝턴은 이 일화의 진위가 의심스럽다고 서술하였다.
평생 그의 제자였던 G. 월도 다닝턴은 가우스의 전기를 비롯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과학의 거장』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3. 주요 업적
가우스는 그의 저서 《산술 연구(디스퀴시티오네스 아리트메티카이/Disquisitiones Arithmeticaela)》를 통해 정수론 분야에 혁명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정수의 나누어떨어지는 개념을 단순화한 합동 산술과 합동식을 도입했다.[44] 또한, 1보다 큰 모든 자연수는 소인수들의 순서를 무시하면 유일한 방법으로 소인수 분해된다는 산술의 기본 정리를 최초로 증명했고,[44]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장 르 롱 달랑베르에 의해 발표되었지만 엄격하게 증명되지 못했던 이차 상호 법칙을 증명하였다.[44] 이러한 업적들이 담긴 《산술 연구》는 정수론을 학문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44]
가우스는 1795년부터 정수론 연구를 시작하여, 1798년부터 1801년까지 ''산술연구''를 집필 및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합동식을 나타내는 기호(≡)를 도입하여 합동 개념을 명확히 하고 모듈러 산술에 활용했다.[44] 또한, 소인수분해의 유일성 정리와 n을 법으로 하는 원시근을 다루었다.[44] 책의 주요 부분에서 가우스는 이차 상호 법칙의 최초 두 가지 증명을 제시하고 이차 형식 이론과 삼원 이차 형식 이론을 전개했다.[44]
''산술연구''에는 이차 형식의 가우스 합성 법칙과 정수를 세 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내는 방법의 수를 열거한 내용이 있다.[44] 그는 ''n'' = 3에 대한 페르마 다각수 정리의 삼각형 경우를 증명했고,[44] 1801년에 이미 류수 공식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4]
책의 마지막 장에서 가우스는 작도 가능한 정십칠각형(17각형)을 컴퍼스와 자만으로 작도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44] 그는 다각형의 변의 수가 2의 거듭제곱이거나 2의 거듭제곱과 임의의 개수의 서로 다른 페르마 소수의 곱인 경우 정다각형을 작도할 수 있음을 보였다.[44]
가우스는 1792년에 경험적으로 발견한 추측(후에 소수 정리로 불리게 됨)을 통해 적분 로그를 이용하여 소수의 개수를 추정하였다.[47]
1816년, 가우스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FLT) 증명에 대한 참가를 거절했지만, 그의 자료에는 FLT의 n = 3 및 n = 5인 경우에 대한 증명이 담긴 미기록 논문이 발견되었다.[48] 그는 아이젠슈타인 정수를 이용한 더 간결한 증명을 개발했다.[48]
가우스는 1831년 케플러 추측 해결에 기여했으며,[49] 제버의 책을 검토하면서 그의 주장을 간소화하고 중심 추측을 증명했다.[51]
이차 잉여에 관한 두 편의 논문(1828년, 1832년)에서 가우스는 가우스 정수 의 환을 도입하고, 그것이 소인수분해 정역임을 보였다.[52] 그리고 페르마의 소정리와 가우스의 보조정리와 같은 주요 산술 개념을 일반화했다.[52] 그는 복소 정수의 환이 고차 상호 법칙에 대한 자연스러운 환경이라고 생각했다.[53]
두 번째 논문에서 그는 사차 상호 법칙의 일반 법칙을 명시하고 그 특별한 경우들을 몇 가지 증명했다.[52] 1818년의 이전 간행물에서 그는 가우스 합을 사용하여 고차 상호 법칙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44]
가우스는 고대 그리스 수학자들에게 기원을 갖는 정규와 컴파스에 의한 정다각형 작도 문제에 대한 정확한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고, 정십칠각형이 작도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1796년 3월 30일).[143] 그는 이 업적에 매우 만족하여 자신의 묘비에 정십칠각형을 새겨 달라고 요청했다.[142]
3. 1. 정수론
가우스의 저서 《산술 연구(디스퀴시티오네스 아리트메티카이/Disquisitiones Arithmeticaela)》는 정수론의 용어에 있어서 혁명적 개선을 가져왔다. 그는 정수의 나누어떨어지는 개념을 단순화시킨 합동 산술과 합동식을 만들었다.[44] 또한, 1보다 큰 모든 자연수는 소인수들의 순서를 무시하면 유일한 방법으로 소인수 분해된다는 산술의 기본 정리를 최초로 증명했고,[44]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장 르 롱 달랑베르에 의해 발표되었지만 엄격하게 증명되지 못했던 이차 상호 법칙을 증명하였다.[44] 이러한 성과를 포함하고 있는 가우스의 《산술 연구》는 정수론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44]가우스는 1795년부터 정수론 연구를 시작하여, 1798년부터 1801년까지 ''산술연구''를 집필, 출판하여 정수론을 학문 분야로 확립했다. 여기서 그는 합동식을 나타내는 세 개의 막대 기호(≡)를 도입하여 합동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모듈러 산술에 활용한다.[44] 이 책은 소인수분해의 유일성 정리와 n을 법으로 하는 원시근을 다룬다.[44] 주요 부분에서 가우스는 이차 상호 법칙의 최초 두 가지 증명을 제시하고 이차 형식 이론과 삼원 이차 형식 이론을 전개한다.[44]
''산술연구''에는 이차 형식의 가우스 합성 법칙과 정수를 세 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내는 방법의 수를 열거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44] 그는 ''n'' = 3에 대한 페르마 다각수 정리의 삼각형 경우를 증명하고,[44] 1801년에 이미 류수 공식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4]
마지막 장에서 가우스는 작도 가능한 정십칠각형(17각형)을 컴퍼스와 자로 작도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44] 그는 다각형의 변의 수가 2의 거듭제곱이거나 2의 거듭제곱과 임의의 개수의 서로 다른 페르마 소수의 곱인 경우 정다각형을 작도할 수 있음을 보였다.[44]
가우스는 1792년 경험적으로 발견한 추측(후에 소수 정리로 불리게 됨)으로, 적분 로그를 이용하여 소수의 개수를 추정하였다.[47]
1816년 그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FLT) 증명에 대한 참가를 거절했지만, 그의 자료 중에는 FLT의 n = 3 및 n = 5인 경우에 대한 증명이 담긴 미기록 논문이 발견되었다.[48] 그는 아이젠슈타인 정수를 이용한 보다 간결한 증명을 개발했다.[48]
가우스는 1831년 케플러 추측 해결에 기여했으며,[49] 제버의 책을 검토하면서 그의 주장을 간소화하고 중심 추측을 증명했다.[51]
이차 잉여에 관한 두 편의 논문(1828년, 1832년)에서 가우스는 가우스 정수 의 환을 도입하고, 그것이 소인수분해 정역임을 보였다.[52] 그리고 페르마의 소정리와 가우스의 보조정리와 같은 몇 가지 주요 산술 개념을 일반화했다.[52] 그는 복소 정수의 환이 고차 상호 법칙에 대한 자연스러운 환경이라고 생각했다.[53]
두 번째 논문에서 그는 사차 상호 법칙의 일반 법칙을 명시하고 그 특별한 경우들을 몇 가지 증명했다.[52] 1818년의 이전 간행물에서 그는 가우스 합을 사용하여 고차 상호 법칙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44]
가우스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들에게 기원을 갖는 정규와 컴파스에 의한 정다각형 작도 문제에 정확한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고, 정십칠각형이 작도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1796년 3월 30일).[143] 그는 이 결과를 매우 기뻐하며 자신의 묘비에 정십칠각형을 새길 것을 요청했다.[142]
3. 2. 대수학
가우스는 1799년 박사 학위 논문에서 모든 상수가 아닌 단변수 다항식(polynomial)은 복소수 계수를 가질 때 적어도 하나의 복소 근(root)을 갖는다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fundamental theorem of algebra)를 증명했다.[43]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를 포함한 이전 수학자들의 증명은 잘못되었으며, 가우스는 이들의 연구를 비판했다.[43] 이후 가우스는 세 가지 다른 증명을 추가로 제시했고, 1849년에 발표된 마지막 증명이 일반적으로 엄밀하다고 여겨진다.[43]가우스는 복소수의 중요성을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당시 복소수는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가능한 한 사용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가우스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증명한 박사 학위 논문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허수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다항식이 실수 범위 내에서 1차 또는 2차 인수로 분해된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가우스는 허수에 대한 편견 없이 복소수 세계를 깊이 연구하여 많은 결과를 얻었다.

3. 3. 해석학
가우스는 해석학 분야에서 산술-기하 평균(AGM)의 개념을 발견하고, 1798년에서 1799년 사이에 랜던 변환을 통해 타원 적분과의 관계를 발견했다.[54] 일기에는 가우스 상수와 렘니스케이트 타원 함수의 연결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가우스는 이 결과가 "분명히 분석의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열 것"이라고 언급했다.[54] 1811년 베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코시 적분 정리를 알고 있었고, 극점 주위에서 적분할 때 복소 유수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45][55]오일러의 오각수 정리와 AGM 및 렘니스케이트 함수에 대한 연구는 야코비 세타 함수에 대한 많은 결과를 가져왔고,[45] 1808년 후에는 야코비 삼중곱 항등식을 발견했다.[56] 그의 연구는 1808년부터 타원 함수에 대해 3, 5, 7차 모듈 변환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45]
가우스는 모듈 형식 이론의 일부를 알고 있었으며,[45] AGM의 무한히 많은 값과 그 두 개의 "가장 간단한 값" 사이의 깊은 연결을 발견했다.[54] 그는 모듈 군에 대한 기본 영역의 핵심 개념을 인식하고 스케치했으며,[57] 모든 각이 인 "정삼각형" 쌍곡선 삼각형에 의한 단위 원판의 테셀레이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58]
가우스는 가우스 이차 합의 부호 결정에 대한 "Summatio quarundam serierum singularium"(1811) 출판물에서 이항 계수의 q-아날로그를 도입하고 타원 함수 이론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 여러 항등식으로 주요 문제를 해결했다.[45]
"Disquisitiones generales circa series infinitam..."(1813)에서 그는 일반적인 초기하 함수 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처리를 제공하고, 당시 알려진 많은 함수가 초기하 함수의 특수한 경우임을 보여준다. 이 연구는 수학 역사상 무한 급수의 수렴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한 최초의 연구이다. 또한, 초기하 함수의 비율로 나타나는 무한 연분수인 가우스 연분수를 다룬다.
1823년 가우스는 등각 사상에 관한 논문으로 덴마크 학회의 상을 수상했는데, 이 논문에는 복소 해석학 분야와 관련된 여러 발전이 포함되어 있다. 가우스는 복소 평면에서 각도를 보존하는 사상은 복소 해석 함수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벨트라미 방정식을 사용하여 해석적 표면에서 등온 좌표의 존재를 증명했다.
3. 4. 미분기하학
가우스는 측지학 연구를 통해 미분기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46] 1828년 곡률 개념에 대한 중요한 성질을 제시하고, 가우스의 빼어난 정리를 증명하였다.[146] 이 정리에 따르면, 면의 곡률은 측정 각들과 면의 거리에 따라서 완전히 결정되며, 곡률은 면이 3차원 공간상에서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에 의존하지 않는다.가우스의 탁월한 정리는 곡면을 2중으로 확장된 다양체로 추상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다양체의 내재적 성질(즉, 계량)과 주변 공간에서의 물리적 실현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가우스 곡률을 가진 곡면 사이의 등거리 변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구나 타원체를 왜곡 없이 평면으로 변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투영 설계에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한다.[146]
가우스는 측지선에 대한 연구에서 측지 삼각형에 대한 국소적인 가우스-보네 정리를 증명하고, 임의의 연속 곡률을 가진 곡면 위의 측지 삼각형에 대한 구면 삼각형에 대한 르장드르 정리를 일반화했다.[146] 그는 "충분히 작은" 측지 삼각형의 각이 같은 변을 가진 평면 삼각형의 각에서 벗어나는 정도가 삼각형 내부의 곡면의 거동에 관계없이 삼각형 꼭짓점에서의 곡면 곡률 값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146]
1822년에서 1825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우스의 원고에는 "측면 곡률"(독일어: "Seitenkrümmung")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며, 등거리 변환 하에서 불변성을 증명했다. 이는 페르디난트 민딩에 의해 1830년에 출판되었다. 이 논문에는 총 곡률에 대한 그의 보조정리의 핵심과 1848년 피에르 오시안 보네가 발견하고 증명한 가우스-보네 정리가 포함되어 있다.[146]
가우스는 곡면론을 창시하여, 후의 리만 기하학에 영향을 주었다. 1827년에 『곡면의 연구』(Disquisitiones generales circa superficies curvasla)를 출판하고, 곡면의 면적과 대응하는 단위 구면의 면적의 무한소비로서 의미 지어지는 곡률(가우스 곡률)이 곡면의 내재적인 양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라틴어로 Theorema Egregium(탁월한 정리)이라고 불렀다. 이 정리는 미분기하학에서 가우스의 기본 정리, 또는 단순히 가우스의 정리라고도 불린다.[146]
3. 5. 천문학
가우스가 과학계에서 유명해진 것은 왜행성 세레스의 궤도를 예측했기 때문이다.[65] 주세페 피아치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태양 광선 속으로 사라진 세레스의 궤도를 이전의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방법들로는 완전히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가우스는 그의 위치 추산력(천체의 매일 매일의 위치가 미리 쓰여진 천문학적 달력)을 바탕으로, 세레스의 위치를 거의 정확하게 예측해 내었다.[66] 이후, 가우스는 그의 방법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새로운 행성이 발견되는대로 궤도를 계산했다. 그 방법은 《천체 운동론》으로 발표되었고, 이후에 가우스의 제자인 요한 프란츠 엥케에 의해서 개선되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1801년 1월 1일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주세페 피아치는 소행성 세레스를 발견했지만, 그것을 며칠동안 밖에는 관찰할 수 없었다. 가우스는 그것이 다시 발견될 수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타에서 1801년 12월 31일에 프란츠 크사버 폰 차흐(Franz Xaver von Zachde)에 의해서 재발견되었고, 하루 뒤엔 브레멘에서 하인리히 올베르스에 의해서 재발견되었다.[66] 차흐는 가우스의 지적인 작업과 계산이 없었다면 세레스를 다시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801년 1월 1일 피아치의 세레스 발견은 가우스가 커다란 행성들에 의해서 방해받은 미행성의 운동에 관한 이론에 대한 작업을 하도록 이끌었다. 이 작업은 《천체 운동론》(Theoria motus corporum coelestium in sectionibus conicis solem ambientumla, 원뿔 곡선을 따라서 태양을 공전하는 천체 운동론)이라는 이름으로 1809년에 출판되었다.[67] 피아치는 세레스의 움직임을 단지 2달동안 밤하늘을 가로질러서, 3도 만큼만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때, 세레스는 태양 빛 뒤로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몇 달 뒤 세레스가 다시 나타났을 때, 당시의 수학적인 방법들로는 3도(전체 궤도의 1%)의 부족한 데이터로부터 위치를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피아치는 그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당시, 23세였던 가우스는 그 문제에 관해서 직접 듣고 달려들었다. 석 달동안 집중해서 작업을 한 뒤에, 그는 세레스의 최초 발견으로부터 약 1년 뒤인 1801년 12월의 위치를 예측했고, 이 예측은 0.5도 내에서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그는 또한 18세기의 궤도 예측에 대한 그 성가신 수학을 합리화했다. 《천체 운동론》으로 몇 년 뒤에 출판된 그의 적은 천문학적인 계산에 대한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가우스 인력상수를 제시했고,[12] 오늘날에는 측정 오차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모든 과학에 사용되는 최소제곱법을 포함하고 있었다. 1809년에 가우스는 정규 분포 오차 가정하에 그 방법을 증명할 수 있었다. 최소제곱법은 1805년에 이미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가 발표하였지만, 가우스의 편지들과 사후에 발견된 논문들을 통해서 가우스가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가우스의 방법은 8차 방정식으로 이어지며, 그 중 하나의 해는 지구의 궤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물리적 조건을 기반으로 구하는 해를 나머지 여섯 개의 해에서 분리한다. 이 작업에서 가우스는 그 목적을 위해 만든 포괄적인 근사 방법을 사용했다.
새로운 소행성이 발견된 이후, 가우스는 그들의 섭동과 궤도 요소에 매달렸다. 그는 처음에 라플라스의 방법과 유사한 해석적 방법으로 세레스를 조사했지만, 그의 가장 좋아하는 천체는 그 큰 이심률과 궤도 경사각 때문에 라플라스의 방법이 작동하지 않았던 팔라스였다. 가우스는 자신만의 도구인 산술-기하 평균, 초기하 함수, 그리고 그의 보간법을 사용했다. 그는 1812년에 목성과 18:7 비율의 궤도 공명을 발견했다. 가우스는 이 결과를 암호로 제시하고 올베르스와 베셀에게 보낸 편지에서만 명시적인 의미를 제시했다. 수년간의 작업 끝에 그는 1816년에 자신에게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결과 없이 작업을 마쳤다. 이것은 그가 이론 천문학에서 활동을 끝낸 것을 의미했다.

팔라스 섭동에 대한 가우스의 연구의 한 결과는 나중에 "타원 고리 방법"으로 알려지게 된 이론 천문학 방법에 대한 ''Determinatio Attractionis...''(1818)이다. 이것은 행성이 궤도를 따라 해당 궤도 호를 따르는 데 걸리는 시간에 비례하는 질량 밀도를 가진 가상의 고리로 대체되는 평균 개념을 도입했다. 가우스는 여러 단계를 포함하는 그러한 타원 고리의 중력적 인력을 평가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중 하나는 타원 적분을 계산하기 위해 산술-기하 평균(AGM) 알고리즘을 직접 적용하는 것이다.
가우스의 이론 천문학에 대한 공헌이 끝났지만, 관측 천문학의 보다 실용적인 활동은 계속되었고 그의 경력 내내 그를 사로잡았다. 1799년 초에도 가우스는 달 시차를 사용하여 경도를 결정하는 문제를 다루었으며, 이를 위해 그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보다 더 편리한 공식을 개발했다. 천문대장으로 임명된 후 베셀과의 서신을 통해 기본적인 천문 상수에 중요성을 부여했다. 가우스 자신은 장동과 광행차, 태양 좌표 및 굴절에 대한 표를 제공했다. 그는 구면 기하학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항성 항해에 대한 몇 가지 실용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주로 소행성과 혜성에 대한 많은 관측 결과를 발표했으며, 그의 마지막 관측은 1851년 7월 28일 일식이었다.
1807년에 괴팅겐 천문대장이 되었다. 거기서도 측정용 기재의 개발(가우스식 렌즈의 설계), 타원 함수의 행성 섭동 운동에의 응용, 역학에서의 최소 작용의 법칙의 정식화의 하나인 「가우스의 최소 구속의 원리」등, 수많은 발견을 하고 있다.
3. 6. 측지학
1818년 가우스는 하노버 주의 측지선을 측량하고, 이전의 덴마크 측량들과 연결하는 작업을 수행했다.[110] 그는 측량 작업을 위해 헬리오트로프를 발명했는데, 이는 거울로 태양광을 반사시켜 먼 거리에서 위치를 측정하는 기기였다.[110] 1821년에는 하노버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의 측지 사업 학술 고문으로 위촉받아 곡면론, 등각 사상 이론, 곡면의 전개 가능성 등을 연구했다.[76] 또한 야외 측량을 수행하고 감독했으며, 회광기와 각을 재는 가우스의 방법을 이용하여 관측의 정확성을 높였다.[76]
가우스는 기하학적 관점에서 지표면을 정의했는데, 이는 모든 점에서 중력의 방향이 직각으로 교차하는 곡면, 즉 준위 곡면이었다.[77] 이는 오늘날 퍼텐셜 이론으로 불리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의 이론적 연구들은 현대 측지학의 기초가 되었다.[77] 1828년 가우스는 위도의 차이를 연구하면서 중력 방향에 수직인 표면으로서 지구의 형태에 대한 물리적 근사를 정의했다.[78]
가우스는 1799년부터 측지 문제에 매달렸고, 1804년부터는 섹스턴트를 이용하여 측지 실무를 독학했다. 1816년부터 그의 제자인 하인리히 크리스티안 슈마허(Heinrich Christian Schumacher)는 유틀란트(Jutland) 반도의 삼각측량을 수행했다. 슈마허는 가우스에게 하노버 왕국(Kingdom of Hanover) 남쪽으로 이 작업을 계속해 줄 것을 요청했고, 가우스는 이를 수락했다. 1820년 5월, 조지 4세(King George IV)는 가우스에게 측량 명령을 내렸다.
가우스와 슈마허는 호측량을 위해 삼각망 내의 두 지점에 대한 정확한 천문학적 결정을 수행했다. 그들은 괴팅겐과 알토나의 두 천문대가 거의 같은 경도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이용했다. 위도는 제시 램스덴(Jesse Ramsden|Ramsden)의 천정권을 사용하여 측정했다.
1821년부터 1825년까지 가우스는 삼각측량 작업을 직접 지휘했다. 그는 드란스펠트(Dransfeld)의 호어 하겐(Hoher Hagen (Dransfeld)|Hoher Hagen), 투링겐 숲(Thuringian Forest)의 그로서 인젤스베르크(Großer Inselsberg), 하르츠 산맥(Harz)의 브로켄(Brocken) 사이의 삼각형을 측정했는데, 이는 가우스가 측정한 것 중 가장 큰 것이었다. 가우스는 헬리오트로프 외에도 추가 거울이 장착된 섹스턴트를 ''보조 헬리오트로프(vice heliotrope)''라고 부르며 측량에 활용했다.
가우스는 하노버 군대의 군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1820년에는 슈마허의 기준선(Baseline (surveying)|기준선) 측정에 참여했다. 측량 결과, 근사 지구 타원체의 납작함에 대한 더 나은 값이 얻어졌다. 가우스는 평면 지도에서 측지 데이터를 나타내기 위해 타원형 지구의 보편 횡적 메르카토르 도법(''합동 투영(conform projection)'')을 개발했다.
호측량이 끝난 후, 가우스는 1828년 3월 25일 왕실 법령에 따라 하노버 왕국 전체의 측량을 위해 삼각측량을 서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1844년에 완료되었고, 가우스는 정부에 최종 보고서를 보냈다. 그의 투영 방법은 1866년까지 편집되지 않았다.
3. 7. 전자기학
전류가 나침반 바늘에 영향을 준다는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의 발견과 마이클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발견을 토대로,[96] 가우스는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와 함께 전자석 전신기를 만들었다.[102][103] 전신기의 선은 약 1km에 달했고, 전신기를 통해서 짧은 메모를 교환했기 때문에 이 장치는 실질적으로 이용된 최초의 전기적 전신기였다.가우스는 1831년 독일 괴팅겐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취임한 때부터, 물리학 교수인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와 공동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96] 지구 자기장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이끌어 내고, 전기 법칙들로부터 키르히호프의 법칙을 유도하였다.[96]
1832년에는 〈지자기력의 절대적 측정〉(인텐시타스 비스 마그네티카이 테레스트리스 아드 멘수람 압솔루탐 레보카타/Intensitas vis magneticae terrestris ad mensuram absolutam revocatala)이라는 논문에서 절대 단위계를 도입하여, 물리학에서 정량적인 측정에 대한 새로운 원리를 제시했다. 가우스의 새로운 관찰 방법을 통해서, 지구의 자기장을 이전에 비해서 월등하게 정확한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가우스와 베버는 1833년 처음으로 전자기식 전신기를 만들어서, 독일 괴팅겐 물리협회와 관측소를 연결했고, 자기 관측을 위해서 관측소에 자기 기록계를 제작했다.[97] 그리고 베버와 함께 자기 학회(magnetischer Verein)를 설립했고, 이 단체는 세계 곳곳에서 지구의 자기장을 측정하는 것을 지원하였다.[97] 그는 자기장에서 수평 밀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97]
1836년 훔볼트는 당시 왕립 학회 회장이었던 서식스 공작(Prince Augustus Frederick, Duke of Sussex)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령(British dominions)에 지구자기 관측소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으며, 그의 방법을 사용하여 표준화된 조건 하에서 자기 측정을 수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98][99]
그리고 가우스와 베버의 단위 체계는 1881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회의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센티미터, 그램, 초를 기본 단위로 하는 CGS 단위계로 승인되었다. 그의 이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자기력 선속의 밀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가우스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지자기의 일반 이론〉(Allgemeine Theorie des Erdmagnetismusde, 1838)을 통해서 지구의 자기장의 원인이 지구 내부에 있다고 했고, 나중에 북극의 오로라에 의한 자기 혼란과 같은 다른 요인들도 고려되었다.

가우스는 정전기, 전기역학, 전자기학, 그리고 전자기 유도의 장거리 효과에 대한 통합 법칙을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비교할 만한 것을 찾으려고 시도했지만,[100] 그의 시도는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다.

3. 8. 기타 업적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수학과 과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최소제곱법은 측정한 값을 바탕으로 결과의 제곱합이 최소가 되는 값을 구하는 방법으로, 가우스는 1795년에 이 방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37][70][71]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가 1806년에 최소제곱법을 처음 발표했지만, 가우스는 이전부터 이 방법을 사용해왔으며, 세레스의 궤도를 계산할 때도 활용했다.[37] 가우스는 정규 분포를 가정한 선형 불편추정량 클래스 내에서 최소 표본 분산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72]가우스는 수치 해석 분야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59] 1816년에 발표된 가우스 구적법이 그 예시이다. 1823년에는 가우스-자이델 방법을 사용하여 4X4 선형 방정식 계를 푸는 방법을 설명하고, 이를 "직접 소거" 방법보다 추천했다.[60][61] 또한, 1805년에는 쿨리와 튜키의 쿨리-튜키 FFT 알고리즘보다 160년 앞서 이산 푸리에 변환을 계산하는 알고리즘을 발명했다.[62]
천문학 분야에서는 망원경 개발과 관련하여 광학을 연구했다. "빛의 굴절에 관한 연구"에서 렌즈 조합에 대한 간단한 식을 유도해냈다. 모세관 현상과 관련하여 수은의 모세 상수를 구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해밀턴의 원리와 관련된 논의도 진행했다.
확률론 분야에서는 가우스-쿠즈민 분포를 유도하고, 연분수의 측도론에서 최초의 결과를 도출했다.[75] 그는 단봉 분포에 대한 가우스 부등식(체비쇼프형 부등식)을 증명하고, 분산의 표본 분산에 대한 상한과 하한을 유도했다.
기하학 분야에서는 화법기하학의 기본 정리를 기술하고, 선형 분수 변환을 이용하여 구의 회전을 설명했다.[88][89] 존 네이피어의 "놀라운 오각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타원 함수, 네이피어 구면 오각형, 평면의 퐁슬레 오각형을 연결하는 정리를 증명했다.[91][92][93]
4. 가우스의 영향과 유산
가우스는 수학과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업적은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12] 그는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우스는 1796년 3월 30일부터 1814년 7월 9일까지 수학적 발견과 아이디어를 담은 일기를 작성했는데, 이 일기는 그가 죽은 후 1898년에 발견되어 그의 업적을 평가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130] 일기에는 대수학, 해석학, 정수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그의 발견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새로운 행복이 솟아나도다!"(Felicitas novis est factala), "게간을 정복하였다!!(Vicimus GEGANla)"와 같은 표현을 통해 발견의 기쁨을 드러냈다. 여기서 게간/GEGANla은 "산술 기하 평균과 타원함수 사이의 관계"(Nexum medii Arithmetico-Geometricum Expectationibus Generalibus영어)를 의미하는 나게그/NAGEGla를 뒤집어 쓴 것으로 추측된다.
가우스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시작으로, 괴팅겐 과학 및 인문학 아카데미,[113]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14] 영국 왕립 학회,[115]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116] 이탈리아 과학 아카데미,[117] 에든버러 왕립 학회,[118] 바이에른 과학 및 인문학 아카데미,[119] 덴마크 왕립 과학 문학 아카데미, 영국 왕립 천문학회,[120]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121] 등 수많은 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카잔 대학교와 프라하 찰스 대학교는 그에게 명예 회원 자격을 수여했다.
그는 라랑드 상,[126] 덴마크 과학 아카데미 상, 코플리 메달[127] 등을 수상했으며,[12] 레지옹 도뇌르 훈장 기사 작위,[128] 푸르르 메리트 훈장 초대 회원으로 임명되는 등[129] 다양한 훈장을 받았다. 하노버 국왕은 그에게 "호프라트"와 "게하임 호프라트" 칭호를 수여했으며, 1949년에는 브런즈윅과 괴팅겐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사후에는 하노버의 조지 5세의 명으로 "수학의 왕자"라는 명문이 새겨진 메달이 제작되었다.
1964년에는 그의 업적을 연구하기 위해 "가우스-게젤샤프트 괴팅겐"이 설립되었다.[130] 1989년부터 2001년까지 사용된 10독일 마르크 지폐에는 가우스의 초상화와 가우스 분포 그림이 함께 인쇄되었다. 2002년, 국제수학연맹과 독일수학회는 가우스상을 제정했다.
4. 1. 후대 수학자들에게 미친 영향
4. 2. 현대 과학 기술에의 응용
4. 3. 가우스의 이름이 붙은 것들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의 이름을 딴 것들의 목록 문서에서 가우스의 이름이 붙은 다양한 법칙, 기호, 단위 등을 찾아볼 수 있다. 1989년부터 2001년까지 사용된 10독일 마르크 지폐에는 가우스의 초상화가 가우스 분포의 그림 및 수식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2002년, 국제수학연맹과 독일수학회는 가우스의 업적을 기념하여 가우스상을 제정했다.
5. 한국과의 관련성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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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 der Vorgeschichte der Aufforderung Alexander von Humboldt von 1836 an den Präsidenten der Royal Society zur Errichtung geomagnetischer Stationen (Dokumente zu den Beziehungen zwischen A.v. Humboldt und C. F. Gau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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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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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Russland ist seit jeher das gelobte Land für Magnetismus gewesen: Alexander von Humboldt, Carl Friedrich Gauß und die Erforschjung des Erdmagnetismus in Rus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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